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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역사는 나 개인의 삶과 같다 운영자 2018-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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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주님의 은혜를 입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목사님께서는 나에게 두 가지를 행하라고 일러주셨다.
그 한 가지는 아침 저녁으로 성경을 많이 읽어라.
다른 한 가지는 또한 그와같이 기도를 아침저녁으로 많이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직장에 다니고 있던 나는 아침 시간에 기도를 많이 하거나 성경을 읽는 것은
차차리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아침잠이 많은 잠꾸러기였다. 출근 전에는 으례
5분, 5분, 3분, 1분을 카운트하면서 일어나면 준비하고 총알처럼 튀어나가기 바빴다.
그렇게 튀어나가기 직전 마음은 너무나 바쁘지만 몇초 동안 무릎을 꿇고
주님께 그 날 하루를 의탁하며 주님 따라 살기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기를 숭늉 마시듯하고
튀어나가건만 신실하신 주님께서는 그 의뢰하는 것과 구하는 것을 항상, 항상 들어주셨다.
그러나 바쁘다고 기도하지 않는 날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고 나를 구할 이가 없는
이전의 외톨이 삶이 거듭될 뿐이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내가 의지하고 의뢰하면
주님은 꼭 들어주셨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도 안계신 것처럼 소식이 없으셨다.
그러면서 아무리 바빠도 의지하고 의뢰하면 차를 타는 것이나 출근시간 맞추는 것,
사람과의 대인관계, 행하는 일들 속에서 주님의 은혜 베풀어주시는 것을 넘치도록
받았다. 심지어 내가 다니는 영세한 잡지사가 복을 받았다. 
아침 시간은 그렇듯 복잡하지만 퇴근을 하면(늦는 날이 더 많지만)
여유가 괜히 있다. 그래서 저녁 먹고 씻고 나면 가족들과 둘러앉아 그날 하루
주께서 행하신 일들을 나누며 함께 경배하고 기도했는데 끝나는 시간은 무한대였다.
각자 잠들기 전까지 기도했는데 그 시간이 얼마나 달고 좋았던지...
그 시간은 차차 내 삶에 중요한 시간으로 자리잡아갔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좀 더 어려웠는데 그래서 출퇴근 시간 차 안에서 읽는 것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평일에는 틈날 때 좀 읽었는데 읽어감에 따라 그 달콤함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되었다. 주님과의 교통이 기도와 말씀을 읽는 중에도 풍성하게 
일어나서 때로는 성경을 읽는 것인지 떽데굴 떽데굴 구르는 것인지 알 수 가 없었다.
그렇게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주님을 의지하고 읽을 때에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감동 감화, 깨달음과 약속들을 주시고 마음은 회개와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했다. 한 마디로 성령꼐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나를 길러가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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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뒤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가 너희에게 들어가 살게 하는 땅에 들어가 살 때에
내가 너희에게 준 율례와 규례와 법도를 잘 지켜 행하면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복을 주겠다.
그러나 그 반대로 너희가 내 말을 버려 지키지 아니하면 저주와 화를 당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그들이 율법을 어떻게 대했을 때 그 말씀하신 대로의 역사가
반복되었던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구약을 읽으면서 모세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였던 것에 대해 성경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기록하는데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그런 궁금증을 안은 채 계속 읽어갔는데 사무엘 다윗 등 주님을 잘 믿은
그래서 주님께 칭찬을 들은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을 잘 믿었고, 그리고 그만큼 주님께
순종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부분들이 신기하게 내 마음에 와닿으며 보였고
성경 전체를 몇번 정독해서 통독을 하였을 때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일이지만
내 속에는 여러번 정제를 거친 앙금 같은 것이 딱 남아서 자리를 잡고 있는 말씀이
있었으니 "순종"이라고 하는 단 두 음절의 단어였다. 
그 말씀은 저절로 내 안에 거하였는데 얼마 지나면서 주께서 그 말씀대로 나를
길러가시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삶을 살면서 내가 주님의 뜻대로 주안에 살면 내가 무슨 일을 하며 어디로 가든지
(물론 내 맘대로 간다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사는 반경을 말한다.) 주님의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과 그 모든 선하고 좋은 선물이 쏟아졌고 나는 그것에 대한 영광을 사람에게 돌릴
필요가 없잉 당연히 주님께 도돌리며 산 것이 난 주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살았고, 
주님이 행하신다는 것을 명백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상태가 아니거나 일이 죄충우돌하거나 일이 꼬여 안풀리고
시간만 가고 하는 낭패스러운 때도 있었는데 그 떄에는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주님 앞에 무릎꿇고 자신을 살펴서 회개할 것 회개하거나 여쭤보았다.
그러면 쉽사리 주님의 뜻을 벗어나서 고집부리거나, 미워하고 있거나, 고집부리고 있거나
내 힘으로 하려고 주님 품안에서 빠져 나와있거나......하는 이유들을 발견하고
돌이킬 수 있었다. 내가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게 은혜 베푸시는 그 안에 있으면
신기하게도 누구든지 나에게 은혜의 손길 아닌 것이 없다가도
내가 주 안에 거하고 있지 아니하면 귀신같이 안다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낮추임을 당하거나
긍휼이나 은혜나 하는 좋은 것을 입지 못하였다. 즉 주 안에서 누리던 그 어떤 맛도 못보고
그 반대의 일들을 누릴 뿐이었다. 심지어 누군가 까닭없이 나를 미워해도 사람으로 더불어 싸우거나 미워하거나 시비를 가리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기록된 성경 말씀대로의
이유 떄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정말 누가 뭐래도 속으론 조금 억울하고 
아파도 조용히 골방을 찾아 주님 앞에 엎드렸다. 그 앞에서 엎드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원인들을 발견하게 되고, 회개하면서 마음이 겸손해지고 그렇게 되면 겸손해진
나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쏟아져 들어오는 "노다지"를 얻게 된다.
주님을 믿고 주님께 나를 맞추면서 살면 이렇게 좋은 것을 왜 사람이 내게 뭐라한다고
시비를 벌이랴. 그러다 보면 나는 주님 말씀을 못따르게 된다. 미워하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품게 되고...그러면 복음으로 살 수가 없다.
주님은 내가 때로 진정 누군가에 의해 모해를 당하고 그것이 벗겨져야 한다면
주님이 멋지게 벗겨주시기도 하셨다. 속이 시원하도록!
그래서 내가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뜻대로만 살면 돼! 하도록 하셨다.
그런 삶을 살아보면 사람에게는 거져 거져 용서해 줄 일밖에 남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려고 하는데 남의 잘못하는 것이 용서가 잘 안되고 아픈 사람들은
다른 것은 잘 하는 데도 그 부분이 약한데, 그것은 뿌리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 아픔을 주님 앞에 담가놓고 가만히 아픔 속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면 원인이
들어있다.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ㅁ약속하신 대로 생명과 복을 받고
풍성한 삶을 살았다. 그러한 예는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하기 시작했을 때,
다윗의 시대에 잘 드러난다.
그러나 그들이 그 마음에 탐욕이 들어오고 우상이 들어오면
괜히 이방 나라가 쳐들어와 전쟁을 일으키고, 수고하고 노력한 것들을 수탈해 가버리고
자녀들도 심지어 아내까지도 종으로 빼앗겼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에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과의 관계를 항상
체크해 본다. 주님과의 관계에 죄로 인해 틈이 벌어져 있으면 그런일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을 찾아보고 처리하고 나면 다시금 주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자리로
옮겨지고 대적자들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길로 도망치는 역사가 벌어진다.
죄가 없는데 대적자가 쳐들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들의 욕심 때문에 그런 것이었는데
그들은 쳐들어올지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기 때문에 일곱 길로 도망치면서
전리품과 이전에 이스라엘에게 빼앗았던 땅을 도로 토해놓고 조세를 바치면서 살게 된다.
주님과 관계를 바르게 하고 복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이런 은혜가
있다. 구약 이야기(story)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개인적으로 작으나마 이런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다.

구약에 보면 이런 사람들도 나온다. 아하스처럼 암몬과 북이스라엘이 연합해 
쳐들어오려고 하자 인간적인 꾀를 내어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들에게 용병을 사고
강대국의 힘을 빌어서 대적자를 견제하려고 하다가 앗수르에게 유린당하고야 마는...
주님은 그때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아하스의 옆구리를 찌르신다.
"얌마, 너 나한테 물어봐라. 도와달라고 그래봐"
"어디에예 지가 어떻게 주님을 이딴 일로 괴롭혀요. 주님은 거져 성전에서 예배만
받으시라요1"

오므리나 그의 아들 아합은 이런 어려움들을 정치, 외교, 국방력 등으로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느라 온 나라를 시돈과 두로의 우상에게 바치고 온 백성과 자기를 지옥의 
입에다 쌈싸서 넣어주려 했다.

니것이 비단 구약 시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의 모습만이겠는가?

여로보암은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자기 뜻을 꺾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돌이키질 않고
자기 아내를 변장시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하나님께서 그를 북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세워주셨건만 그 마음의 욕심 때문에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자기길을 가려고
하나님을 빗겨나갔다.

나도(요즘 많이 타락했음을 고백,회개중...) 내 마음의 욕심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못버리면 주님의 뜻을 액면대로 온전하게 내 마음이 순복하여 따르지 않고 싶어지고 

슬쩍 나를 위해 왜곡하고 싶어진다.  

 

작성일 : 2009/8/3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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