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행하실 때 만나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 중 몇몇이 그 믿음을 칭찬하신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가나안 여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두로, 시돈 지경으로 가셨다. 아마 제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무리가
그 뒤를 이었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서 가나안 여인이 소리지르며 따라왔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심히 귀신들렸나이다." 예수님은 그 소리를 들으셨는지 못들으셨는지 아무런 대꾸도 않으시고 가던 길을 계속
가신다. 가나안 여인이란 두로와 시돈 지역에 사는 이방여인이다. 곧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이방인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주님께서 그들을 전부 진멸하거나 내쫓으라고 명하신 대상들인데 이스라엘이 다 못 쫓아낸 채 그들 가운데 살게 된
우상숭배자들이다.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섬기던 신들은 바알과 아세라 등이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범죄하여 주꼐 혼도
많이 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그런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래도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이방 여인이 느닷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주시라 부르는 것처럼 주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그가 언제부터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셨는가? 정말 주님이 맞는가? 그는 어쩌면 사람들 사이에 들려오는 소문을 듣고 모든 병을
고쳐주시는 분을 그렇게 부르면 된다는 사전정보 때문에 자기 자신의 처지나 사실을 생각지 않고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다.
주께서 아무런 대꾸가 없이 가시자 제자들이 견디지 못하여 주님께 간구한다. "저 여자를 그냥 두면 계속해서 시끄럽게 소리지르며
따라올 테니 한 말씀하셔서 딱 고쳐주시고 보내버리시지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 다른 곳으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다." 사실이 그랬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로 보냄을 받으셨고 그들 곧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머지 이방인은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푸신 것이다.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내
백성이라 하고 긍휼을 받지 못한 자들을 긍휼히 여겼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여자가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 절하며 구하였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자녀에게 줄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아니 예수님께서 어쩌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수 있는가?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매우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비유로써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과 이방인에 대한 구별을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일반적인 예로 아이의 부모가 아이에게 주려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였다. 그랬는데 그 준비한 음식을 동네에 오가는 개에게
던져주지는 않을 것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여 준비하는 모든 것들은 매우 정성스럽고 누가 뭐라거나 끼여들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는 이런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셔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언약이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던것이다. 그 백성이 계명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들을 찾아 회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이방인 즉 지금까지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고
경외하지도 않고 경건하게 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마귀와 그 수하들을 섬기며 살아왔던 원수의
자식이 마땅히 도와달라, 살려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여인이 대답하였다. "옳소이다. 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는 주님의 원수로 살았고 결코 주님께 부탁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여인은
엎드렸다.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감정적으로 욕으로 듣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씀을 듣고 시인했다. 그리고 자비를 구한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녀의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고 나았다.
주님은 이제 전혀 딴 사람처럼 반응하신다. 그 여인의 믿음 때문이다. 이 여인이 자기보고 개라고 해도 괜찮고 어찌해도 괜찮다.
참고 은헤를 받는 게 수니까 하고 참아서 칭찬을 들은 게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규명이다. 그는 이전에는 조금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돌보셔야할 책임이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녀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우상숭배자요, 원수의
자식이요 백성인 것이다. 그 사실을 바르게 인정하고 돌이킨 것이다. 그것이 은혜를 받는 길이다. 이것이 겸손하게 자기를
인정하고 그런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간청한 믿음이다. 주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큰 은혜를 받을 만한 믿음인 것이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무엇을 가지고 기도할 때 실상 믿음은 못 가지는 경우들이 많다. 믿음이 뭔지 생각도 않는 경우도 있다.
일방적으로 부르짖고 일방적으로 응답 안해주신다고 원망하고 그러기 쉽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시라. 내가 지금 주님께
하고 있는 행동이나 마음가짐이 누구에게 하던 버릇인가? 그 행동이 맞는가?
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 꼭. 가나안 여인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라. 우리는 가나안 여인의 제곱
쯤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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